장지연은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한 언론인으로, 그의 생애는 조선의 운명과 맞물려 극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이를 규탄하는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항일 저항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 행적은 친일 행보로 이어지며, 이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장지연의 항일 저항 활동과 친일 행보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항일 언론인의 길을 걷다
장지연의 대표적인 항일 저항 활동은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발표한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입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불과 5일 후인 11월 20일, 그는 이 논설을 통해 일본의 강압적인 조약 체결을 강력히 규탄하며 민족의 분노를 대변했습니다.
이 사설의 제목인 ‘시일야방성대곡’은 ‘이 날에 목 놓아 통곡한다’는 뜻으로, 조국의 국권이 침탈당하는 현실에 대한 절규를 담고 있습니다. 장지연은 논설에서 을사늑약을 체결한 조선 정부 대신들을 ‘매국의 간신’이라 비난하며, 일본의 침략적 야욕을 폭로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당시 조선 민중에게 국권 회복을 위한 저항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설이 발표된 지 하루 만에 일본의 강압적인 검열에 의해 《황성신문》은 폐간되었고, 장지연은 일본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석방되었지만, 일본의 감시 속에서 언론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이 사건은 그를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근대사에서 언론을 통한 항일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후에도 장지연은 교육 활동과 언론 활동을 병행하며 항일 정신을 이어갔습니다.
민족정신 고취와 교육 운동: 실천적 항일의 길
장지연은 언론 활동 외에도 교육을 통해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는 국권 회복의 핵심이 민족의 계몽과 교육에 있다고 판단하고, 전국적으로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대한협회, 기호흥학회 등의 계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며 민중 계몽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가 중점을 둔 교육은 단순한 학문 교육이 아니라,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조선인의 자주정신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문 중심의 전통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근대적 교육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서적을 출판하고 강연을 통해 민중들에게 국권 회복의 중요성을 설파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도 그는 조선총독부의 강압적인 지배 아래에서 비교적 독립적인 교육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인 이유로 인해 그의 행보에는 변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친일 행보로의 전환: 민족 지도자의 변절
장지연의 생애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의 말년에 보인 친일 행보입니다. 191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일본이 조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기고하며 친일적 논조의 글을 쓰기 시작했고,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시정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가 친일로 전향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합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현실적으로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통치 아래에서 생존을 위해 친일 행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그의 친일 활동이 단순한 생존 전략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 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에도 그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며, 독립운동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그는 독립운동 진영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친일적 입장을 고수하다가 1921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이었으나, 말년에는 친일 행보로 전환하며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초기에는 강력한 항일 저항의 목소리를 내었지만, 식민지 체제 아래에서 현실적인 선택을 하면서 친일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의 생애는 단순히 개인의 변절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이 처했던 현실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 그는 항일 언론인과 친일 인사의 두 얼굴을 가진 인물로 남았으며, 그의 행적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