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공부를 한 슈페어는 1931년 나치당에 가입했다. 그의 건축적 기술 덕분에 당 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히틀러의 최측근이 되었다. 히틀러는 그에게 국가수상부 관저와 뉘른베르크의 나치당 집회장을 포함한 많은 구조물들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업무를 맡겼으며, 1937년 슈페어는 베를린 일반건물 감사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직위에서 그는 베를린의 유대인 세입자들을 주택에서 추방하는 중앙 재정착 부서를 책임졌다. 1942년 2월 슈페어는 군수전쟁생산성의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검증되지 않은 통계를 활용하여 자신이 독일이 전쟁을 더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든 군비 기적을 실행했다고 주장했다.[1] 1944년 슈페어는 전투기 생산량 증가를 위한 대책 위원회를 수립했는데, 이 위원회는 독일의 전쟁 수행을 위해 강제 노역자들을 이용하도록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이 종식된 이후, 슈페어는 나치의 잔혹 행위로 국제군사재판소가 기소한 24명의 '주요 전범' 중 한 명으로 지목되었다. 그는 주로 노예 노동을 이용한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 혐의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간신히 사형을 피했다. 슈페어는 20년의 징역을 복역한 이후 1966년 풀려났으며, 수감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3제국의 중심에서》와 《슈판다우: 비밀 일기》의 두 권의 자서전을 썼다. 이 두 권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대중들은 그가 제공한 제3제국의 내부 사정에 매료되었다. 슈페어는 198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슈페어는 나치 독일의 범죄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홀로코스트에 관한 자신의 지식과 책임을 지속적으로 부인했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 구축은 전후 수십 년간 역사학을 지배하여 그가 단순히 독일의 군수산업에 혁명을 일으킨 비정치적 기술관료로 인식하는 '슈페어 신화'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신화는 1980년대 군비 기적이 나치의 선전에 기인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슈페어가 죽고 25년 뒤, 애덤 투즈는 자신의 책 《파괴의 대가》에서 그가 비정치적 기술관료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썼고, 마틴 키친은 자신의 책 《슈페어: 히틀러의 건축가》에서 사실 독일의 군비 생산 증가의 많은 부분이 슈페어의 전임자인 프리츠 토트가 도입한 제도 때문이었으며 슈페어는 〈최종 해결책〉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수십 년 동안 이러한 슈페어 신화를 무너뜨리는 증거가 드러났다.